한국인을 경악시킨 번트 ... 일본 야구가 안긴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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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한국에서는 국민스포츠지만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꽤 생소한 종목이다. 야구를 처음 시작한 미국과 그 미국의 강한 문화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그 주변 지역들을 제외하면 일본과 과거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성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역시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영향으로 야구가 시작됐다.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조선 청년들을 모아 황성 YMCA 야구단을 조직한 1904년이 한국 야구 역사의 출발점이며, 일본의 식민통치 기간에 세워진 근대식 학교들에서 운영된 야구부들을 통해 기술이 발전되고 대중의 관심도 확장되어왔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지원에 힘입어 다양한 야구대회들이 열리면서 야구인들이 체육행정의 중심적인 위치로 진입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야구를 일본 식민통치나 미군정 통치의 결과라고 단순히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야구는 일본이나 미국이 가르쳐준 것이었다기보다는, 한국인들이 "어깨너머로" 배워오면서 성장한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본 야구와 한국 야구 제국 시기의 일본은 미국과 그 주변 국가들을 제외하면 성공적으로 야구 문화가 이식된 거의 유일한 나라였다. 1870년대에 미국인들에 의해 전해진 야구가 1890년대부터 일본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다이이찌 고교 학생들의 활약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4년에는 메이저리그 선발팀 방문경기에서 17세 소년 사와무라 에이지가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포진된 전설적인 타선을 상대로 9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한 사건을 계기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 2년 뒤인 1936년에는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1940년대 초에는 고교 야구부의 수가 1000개를 넘어섰다. ![]() 물론 1904년에 질레트 선교사에 의해 창설되어 10여 년간 왕성하게 활동한 최초의 한국인 야구팀인 황성 YMCA 야구단이 있었고 그들에게 도전하는 과정에서 야구부를 만들고 발전시킨 휘문, 경신, 배재, 중앙, 보성 등의 학교들이 있었다. 그래서 1920년에는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제1회 대회로 인정되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1920년대 이후로는 일본인 학교들을 모방해서 야구부를 만드는 학교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나 일본의 야구계에서 조선인 학교에 일본인 지도자를 보내거나 교류 활동을 기획해 조선인을 상대로 야구 교육을 지원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컨대 1930년대 이후 일본의 프로야구팀이나 도쿄대, 게이오대, 릿쿄대 등 일본에서 프로야구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던 "도쿄 6대학 리그" 소속의 유명 대학팀들이 서울에서 방문경기를 치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부분은 일본인 단체의 초청으로 성사된 철도국이나 경성의전 등 일본인들로 구성된 팀들과의 친선경기일 뿐이었으며, 초청된 관중들도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에 국한되었다. 그래서 한발 앞선 일본의 야구 기술을 조선의 청년들에게 전한 것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조선인들이었다. 1890년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배재학당과 YMCA 교육관 같은 곳에서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의 세례를 받은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교육을 받은 근대교육 1세대 청년들이 방학을 이용해 고향으로 돌아와 일본에서 배운 야구 기술을 전수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 동경 유학생들, 조선에 야구기술을 전파하다 1909년 와세다대생 윤기현을 중심으로 모인 25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처음 "동경 유학생팀"을 구성해 고향을 찾아 당대 조선 최강을 자부하던 황성 YMCA팀과 모국 방문경기를 벌여 무려 19대 9의 대승을 거두며 한발 앞선 일본야구의 위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했다. 그들의 방문경기는 여러모로 초창기 한국 야구계에 큰 충격을 던졌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번트"와 "더블플레이"였다. 타자 자신은 아웃당할 각오로 코앞에 타구를 떨굼으로써 주자들을 진루시키는 전술은 투수가 공을 던지면 힘껏 후려치는 것만 생각했던 당시 조선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전체 내용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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