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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제일 야구 잘하는 나라가 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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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Z 댓글 0건 조회 1,866회 작성일 22-05-1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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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미치지 못하는 능력이 던지기다. 그래서 예컨대 군대에 간 남자들이 신병훈련을 받을 때 생각처럼 되지 않는 대표적인 과목이 수류탄 던지기다. 저마다 앞사람이 던지는 모양을 비웃으며 자신 있게 나서지만, 대부분은 충분히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리의 절반도 채 날아가지 않는다.

의욕이 지나쳐 자기가 쓴 방탄헬멧에 팔이 엉키며 수류탄을 등 뒤에 떨어트려 주변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사례도 간혹 나올 정도다. 그래서 던지기의 달인인 야구선수, 그것도 투수들을 만나면 간혹 묻게 된다. 수류탄을 얼마나 멀리 던졌는지. 그런데 1977년부터 1982년까지 국가대표 투수로 활약하며 두 차례의 세계대회 우승에 기여했던 임호균 교수(을지대학 평생교육원)의 답은 이랬다.
"나는 수류탄 안 던졌어. 군사훈련 받을 때 수류탄 던지라기에 "나 국가대표 투수인데, 이거 던지다가 어깨 다치면 책임 질 거냐"고 그랬더니 그냥 넘어가더라고. 그 때는 국가대표의 몸에 대해서는 아무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지. 사회 전체적으로 그렇게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어. 국가를 대표할 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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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세계 제패
 
한국 야구가 세계 규모의 대회에 처음 도전장을 내민 것은 1975년 캐나다 멍크턴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였다. 모두 8개 나라가 출전한 그 대회에서 한국은 조별 예선에서 3승 4패를 기록하며 3위, 전체로 보면 6위에 해당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은 처음으로 콜럼비아, 니카라과, 이탈리아 같은 서양권 팀들을 상대해 승리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2년 뒤인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같은 대회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76년 북중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갈라져있던 두 개의 국제야구기구가 통합하면서 대회는 규모가 더욱 커졌고, 대회 명칭도 조금 바뀌었다. 예선인 1라운드는 종전처럼 "대륙간컵"이었지만 결선인 2라운드는 "슈퍼월드컵"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국은 9개국이 풀리그로 치른 대륙간컵을 미국, 일본, 대만에게만 1패씩을 당하며 5승 3패로 통과했고, 상위 5개국이 다시 한번씩 맞붙는 슈퍼월드컵에 진출했다.
 
애초에 그 대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성적을 기대하기도 어려웠고, TV나 라디오를 통한 중계방송도 이루어지지 않아 선수단과의 국제전화를 통해 간신히 경기 상황을 파악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라운드 4차전 푸에르토리코와의 경기에서 연장 12회 초에 터진 김재박의 결승타로 역전승해 최소 3위를 확보하면서 국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고, 일본과의 5차전에서도 9회 초 김정수의 결승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입소문은 더욱 번져나갔다. 그것은 야구 세계무대에서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얻은 첫 번째 승리였기 때문이다.

일본전 최고의 수훈선수는 오른손 타자의 무릎을 스칠 듯이 파고드는 슬라이더와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을 걸치듯 흘러나가는 역회전 공을 배합한 왼손 투수 이선희였고, 그는 훗날 구대성과 김광현으로 이어지는 "왼손잡이 일본 킬러" 계보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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