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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이 무려 7배... 한국 야구의 특이한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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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Z 댓글 0건 조회 3,578회 작성일 22-09-2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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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야구를 통해서도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이후였다. 1963년 대부분의 시중은행들이 야구팀을 만들면서 실업야구팀의 수가 2개에서 14개까지 늘어났고 1964년부터는 실업야구리그에 페넌트레이스 제도가 도입되면서 경기의 수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는 곧 야구를 하나의 진로로 선택하는 학생들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는 계기가 됐고, 학생 선수들이 학업보다 야구 훈련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에서 민족적 차별에 시달리면서 악전고투하던 재일교포 야구 선수들에게도 또 하나의 선택 가능한 진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프로팀 입단이 여의치 않던 혹은 프로팀에서도 주전으로 자리잡기가 어렵던 재일교포 선수들 중에 귀국을 고민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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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인 팀에서 뛰던 투수 신용균과 포수 서정리가 1963년 9월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팀 주전 배터리로 활약하며 사상 첫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통산 7승 경력의 투수 김영덕이 귀국해 255이닝을 던지고 단 9점만 내주어 0.3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김영덕은 타자로서도 3할 타율로 타격 6위에 오르는 전설적인 활약을 했다.

같은 해 신용균은 24승을 올리며 다승왕이 됐고 1959년에 귀국한 배수찬이 .336으로 타격왕이 됐다. 그 해 우승은 역시 1960년에 귀국한 김성근이 20승을 올리며 배수찬과 함께 활약한 기업은행에 돌아갔다. 그리고 1965년에는 김영덕을 이적시켜 신용균과 원투펀치를 이룬 크라운맥주가 개막 후 10연승을 질주하는 등 26승 9패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네 명의 재일교포 선수들이 리그의 판도를 좌지우지한 셈이었다.

퍼펙트 피쳐 김영덕과 1차 재일교포 영입 경쟁
 
실업야구팀들이 재일교포 선수들의 영입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1966년에는 제일은행이 낭카이 호크스 2군의 3루수 김동률을 영입했고 한일은행이 긴테스 버팔로스 2군 유격수 허종만(경남고 출신 육군 감독 허종만과 동명이인)을 영입했다. 김동률은 투수까지 겸업하며 1966년 13승으로 다승 3위에 오르는가 하면 1967년에는 도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타격왕에 올랐고, 허종만은 1967년 조선일보가 팬투표를 통해 선정한 청룡야구상 유격수 부문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역시 제일은행이 재일교포 2세 투수 김승리를 영입했고, 1968년에는 기업은행이 투수 한광홍을 선발했다. 김승리는 한 해 뒤 일본 프로야구 니시테츠 라이온스에 스카우트 되면서 돌아갔고 한광홍은 1970년 리그 타격왕에 오르고 1972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투타 양면에서 활약했고 성균관대 감독을 지냈다.

그리고 1970년에는 한일은행이 한큐 브레이브스 등에서 9년간 프로생활을 한 김호중을 영입했는데, 그는 1970년대 내내 리그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로 군림했고 실업팀 한국화장품 감독과 프로팀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를 지냈다.
 
하지만 1975년 이후 재일교포 선수 영입 열풍은 한풀 꺾이게 된다. 1975년에 과감한 투자를 통해 창단과 동시에 우승을 차지한 실업팀 롯데 자이언츠가 주니치 출신의 카나야마(金山)와 사회인팀 서농운수 출신의 투수 호시야마(星山)를 창단 멤버로 영입했고 1977년에는 롯데 오리온즈 투수 박덕용을 6개월간 임대해 활용하긴 했지만, 다른 팀들은 잠잠했다.

1975년 3월 24일 재무부 장관 김용환이 은행장회의에서 대대적인 금융계 구태 일소를 공언하면서 본격화된 "서정쇄신" 때문이었다. 관행화되어있던 은행권의 규정 외 수당과 휴가 등이 폐지되면서 임직원 실질 임금이 17%나 하락하고 천 명 이상의 은행원들이 이직했을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많게는 일반 선수들의 5배에 달했던 재일교포 선수들의 몸값은 대부분 다른 항목에서 전용된 "규정 외 지출"에 해당했고, 공기업들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했다.
 
30승 투수 장명부와 2차 재일교포 영입 경쟁

다시 한 번 상황이 바뀐 것은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된 이후였다. 1970년대를 거치며 빠르게 성장한 내수 시장과 소비 문화는 스포츠 산업의 가능성을 확장했고, 프로야구 창설에 참여한 기업들은 "실업야구 선수들의 10배에 해당하는 연봉"을 지급하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실력을 갖춘 재일교포 선수들에게 줄 수 있는 돈의 크기도 그에 비례해서 커진 것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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